김대중 전 대통령은 왜?

편집자 노트/Editorial | 2009/08/26 13:06 | 창비인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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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우리 역사』의 증보판 작업 당시 한국 근현대사 역사논쟁이 들끓던 차라, 강만길 선생님은 증보판 서문에 역시 한국사 거장다운 ‘설명’을 해주셨다. 그런데 책이 배포될 시점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고, 김대중정권에 대한 두 장(章)을 덧붙인 이번 증보판이, 본의 아니게 그를 역사적으로 해석한 첫 책이 되어버렸다. 결국 책 홍보의 포인트도 김대중정권 평가하며 덧붙인 27, 28강의에 중점이 놓이게 됐고, 다시금 그 부분을 정독하게 됐다. 이렇게 작성된 언론홍보용 내용 요약글(보도자료)에 김대중정권에 대한 저자의 역사적 해석이 들어 있으므로 일부를 옮기면,


김대중정권, 한국 민주주의를 크게 진전시키고 IMF체제를 조기졸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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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대통령취임식에서 연설중인 대통령 김대중>


해방 후 최초로 성립된 이승만정권은 4·19‘혁명’으로, 장면정권은 5·16군사쿠데타로, 박정희정권은 10·26사태로 무너졌으며,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으로 이어진 정권교체는 여당내 자리이동일 뿐이었다. 반면 김대중정권의 성립은 우리의 반세기 공화주의 역사상 정상적 선거를 거쳐 탄생한 최초의 야당정권, 즉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라는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김대중정권은 5·16군사쿠데타의 핵심세력(자유민주연합)과의 연합정권이라는 역사적 한계와, 친군부세력이 다수당이던 의회 현실과 주류언론의 끊임없는 공격이라는 어려움 속에서도 각 부문의 민주화를 크게 진전시켰다. 특히 과거 군사독재정권하에서 발생한 의문사를 밝혀내기 위한 대통령직속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2000년에 설치했으며, 1998년 교원노동조합의 단결권·단체교섭권 인정, 2001년 여성부 신설과 국가인권위원회의 발족 등은 권위주의적 군사독재시대의 잔재를 청산하고 국제수준의 인권국가로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한 역사적 진보였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과거 야당 지도자 시절부터 김대중은 시장원리라는 자유경쟁체제를 근간으로 하면서도 국민·기업·노동자가 경제운영에 함께 참여하는 ‘대중참여경제론’을 내세우며 분배정의의 실현을 주창해왔다. 그러나 김대중정부는 IMF체제를 조속히 벗어나야 한다는 명분하에 시장원리 중심인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강도높게 실시했다. 그 결과 수많은 실직자와 비정규직 양산이라는 극심한 사회양극화 문제를 낳았다. 이같은 김대중정권의 경제사상과 현실정책의 모순에 대해 저자는, IMF체제의 빠른 탈출을 위해서는 노동자와 중산층의 파멸적 희생을 댓가로 하는 신자유주의식 방법밖에 없었다는 안타까운 역사적 현실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김대중정권, 평화통일의 시대를 열어젖히며 ‘상식’적 한미관계를 확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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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6월13일 평양 순안공항에서 만난 대통령 김대중과 위원장 김정일


오래전부터 남북연합→남북연방→완전통일이라는 3단계통일론을 제기해온 김대중은 2000년 남북경제공동체 구성을 북한에 제의했고, 이후 북한 경제원조와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 항구적 평화와 남북간 화해·협력을 내용으로 하는 ‘베를린선언’을 발표한다. 곧바로 남북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열렸으며 역사적인 ‘6·15공동선언’이 선포되기에 이른다. 6·25 같은 전쟁통일은 안된다는 평화통일론의 원칙적 내용만을 담은 1972년의 7·4남북공동성명과 독일의 흡수통일이라는 사건에 대응하여 나온 불가침조약의 성격을 띤 1991년 남북합의서와 달리, 6·15공동선언은 남북의 상호공존을 인정하면서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연방제 사이의 공통점을 모색했으며 이전까지의 남북대립에 실질적인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남북장관급회담이 정례화됐으며, 군사회담·경제회담·적심자회담 등이 잇따라 열렸다. 2000년 10월 대통령 김대중은 이러한 공로로 한국역사상 첫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이처럼 6·15공동선언을 성취한 김대중정권은 남북대결이라는 20세기 분단시대사를 넘어 남북화해협력의 21세기 평화통일시대를 열어젖힌 주역이었다.

김대중정권 성립 후, 대립적이던 남북관계가 화해협력적 관계로 바뀌자 한미관계도 요동치기 시작했다. 미군장갑차에 희생된 여중생 사망사건으로 촉발된 여중생추모 촛불시위는 전국민적 시위로 번졌으며 2002년 12월 14일에는 서울에만 5만명이 넘는 촛불시민이 미국대사관에 몰려가 항의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러한 ‘탈미(脫美)’현상은 차별적이던 한미 SOFA협정을 정상적인 국제관계 수준으로 개선하는 기폭제가 됐다. 저자는 이같은 거대한 촛불시위의 원동력을,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불평등한 한미관계가 정상적인 국제관계로 바뀌어야 한다는 김대중정권 시기 변화한 대중의 역사인식에서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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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여중생 추모를 위해 광화문사거리에 모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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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민주주의와 평화라는 숭고한 가치를 올곧이 실천해온 故 김대중의 신념은 어디서 나왔을까. 20대에 이미 해운업에서 크게 성공한 젊은이가 왜 굳이 험난한 투쟁의 길을 걸었을까. 단지 정치적 야망 때문이었을까. 그러기에는 상상조차 어려운 투옥과 생사의 위기가 너무 많지 않았나. 그렇다면 2009년 1월 15일 그의 일기에 적힌 것처럼 “나는 일생을 예수님의 눌린 자들을 위해 헌신하라는 교훈을 받들”라는 신념 때문이었을까. 물론 종교의 힘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날자 일기 다음 문장의 내용처럼 “납치, 사형 언도, 투옥, 감시, 도청 등 수없는 박해 속에서도 역사와 국민을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 역사는 발전한다는 믿음, 그것 없이 그가 그 엄혹하던 시절을 견뎌낼 수 있었겠는가.

“인류의 역사가 직행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민주주의가 직선적으로만 발전해왔다면, 인류역사 5천년을 통해 바친 그 많은 피와 희생의 결과가 어찌 이 정도밖에 안되겠습니까. 역사가 가는 길은 때로는 정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심할 때는 후퇴하는 것 같을 때도 있게 마련이며, 직선이 아니라 지그재그로 나아간다고도 말해지고 합니다. 좌측으로 흐를 때도 있고 우측으로 흐를 때도 있다는 것이지요. (···) (그러나) 결국 모든 강물은 바다로 흘러가게 마련이지요. 인류의 역사는 장구한 세월을 통해 결국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민주주의의 바다로, 지구 전체가 하나의 평화공동체가 되는 한없이 크고 넓은 바다로 나아가게 마련입니다.”(『20세기 우리 역사』, 7면)

이같은 저자 강만길의 역사관처럼 김대중 전 대통령도 때로는 후퇴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역사가 발전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을까. 그런 역사관이 바로 어떤 고난 속에서도 민주주의와 평화라는 숭고한 가치를 굳건히 지키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우리 근현대사의 발자취를 '올바른' 관점에서 되짚은 저자의 원고를 읽다보니,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긴 마지막 일기의 제목처럼 "역사는 발전한다"는 사실에 더욱 확신이 간다.

-창비 인문사회팀 김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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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6 13:06 2009/08/26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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